융의 심적 진리에 대하여 - 욥에의 응답 [인간의 상과 신의상 -C. G. 융]
'물질적 Physisch' 인 것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즉 심적 心的 진리도 있고, 이는 육체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증명되거나 부인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라인 강이 어느 때인가 하구에서 원래의 근원인 상류로 역류했다는 어떤 일반적인 믿음이 있다면, 비록 그 말이 물질적으로 볼 때 극도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야만 하겠지만 이 믿음 자체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논박될 수도 없고 어떠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심적 사실을 형성한다.
종교적 진술도 이런한 종류에 속한다. 그것은 모두 예외 없이 육체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대상에 관계한다. 종교적 진술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게 될 것이며, 자연과학은 그것을 경험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관계된 것으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종교적 진술은 이미 그 자체로 의심스럽게 된 단순한 기적이며, 정신 Geist의 현실, 즉 의미 Sinn의 현실성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는 항상 스스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미와 정신은 기적 없이도 우리에게 현존하고 인지된다. 기적은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오성에만 호소한다. 그것은 이해되지 못한 정신의 현실에 대한 대체물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것의 생생한 현존이 때로 놀랄 만한 물질적 사건을 수반하지 않는다고 해서 논쟁해서는 안 되며, 다만 후자는 정신에 대한 유일한 본질적 인식을 대치하거나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1
윗 글은 2008년출간된 융의 저작집 Grundwerk C. G. JUNG 융 기본 저작집 4 인간의 상과 신의 상의 '욥에의 응답' 첫머리인 p298의 글을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 융은 진리를 물질적 진리와 심적 진리로 나눈다.
물질적 진리는 체험할수 있는 물질적 기반위의 진리이므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심적 진리는 객관적으로 증명될수 없는 진리이다.
융은 심적인 진리는 그것이 극도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믿음이 존재한다면 그 믿음 자체는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사실'이라는 용어는 두가지로 해석가능해진다.
그중 하나는 사실이란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인 믿음이 존재한다면 그 대상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믿음이 존재한다면 그 대상은 일반적인 믿음이라는 상황속에서 사실로 존재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 말은 부연 설명하자면 일반적인 믿음에 기반한 사실은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이 없어도 일반적인 믿음에 의해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실제로 존재하는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 만들어 지므로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융의 다음 설명을 보면 두 의미 중 어느것을 염두에 두고 설명하였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융은 그 둘을 명확하게 구분해주지 않는다.
종교적 진술을 정신의 영역에 만들어진 의미로 이해하므로 이 의미는 인간의 정신속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물질적으로 증명해내지 못하고, 기적처럼 오감으로 이해되는 것은 오히려 정신적인 의미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융의 설명을 기반으로 추론한다면 융은 '사실'이라는 용어를 두가지 의미 모두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물질적으로 증명할수 없는 인간 정신속의 존재가 한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로 인식된다면 객관적 사실성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보편적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개개의 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함으로써 인간 사회를 물질적으로 지배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와 다름없이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 실체처럼 존재하고 작용하지만 그것이 곧 객관적 실체인 것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융은 이런 사실은 사실이고 진리라고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애초에 물질적으로 증명가능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의미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종교적 진술이기 때문에 이것을 물질적 증명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는 행동자체가 무의미하며 간혹 물질적으로 증명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기적적인 물질화는 인간의 오감으로 이해되는 하위적인 이해로서 오관을 통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보다 확고한 이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인식의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물질적 증명은 오관을 통해 받아들여야 하는 것므로 오관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왜곡될 확률이 높은데 반해서 정신적 즉각적 이해는 오관을 통하지 않으므로 오염되거나 왜곡될 확률이 더 적어서 진정한 의미를 받아들이는데 더 적합하다는 인식론적 입장이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융의 태도는 어느 것이 기준이 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개별적 생명으로서의 인간이 생존하고 사멸해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도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세계를 기준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객관적 세계는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그것이 판단의 기준이지만,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죽는다 하더라도 개별 생명체의 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세계는 인식이 시작된 시점부터 존재를 시작하여 인식이 소멸한 시점에 함께 소멸할 뿐이다.
융의 심적 진리에 대한 사실적 인식은 이처럼 개별적 생명체의 인식의 관점으로 보인다.
이런 개별 생명체의 인식의 관점에서는 객관이 어떻게 움직이고 존재하든, 객관이란 인식의 주체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융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이 인식의 주체와 동떨어진 객관적 물질적 증명에 있지 않고 개별인식 주체의 확신에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종교적 진술은 신의 의미가 인간의 정신에 직접 도달한 결과물로서 굳이 객관적으로 실체화 되고 오관을 거쳐서 인간의 정신에 도달할 필요성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융의 주장은 자연과학적인 애초에 자연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정신적 이해와 인식의 대상이라고 판단해야한다.
- Grundwerk C. G. JUNG 융 기본 저작집 4 인간의 상과 신의 상, 한국융연구원 C. 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솔출판사, 2008년 5월 16일, p29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