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신비주의 체험

진리는 나의 빛 2010. 10. 6. 13:15

출처: 브리태니커

개요
숨겨진 진리나 지혜를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20세기에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으며, 이전 시대에 신비주의가 했던 것과 유사한 역할까지도 기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현대에서 겪게 되는 소외감이 부분적으로 그 원인이 되고 있다.

본질과 의미
신비주의의 목표는 신이나 신성한 것과 결합하는 것이다. 통상 이러한 결합은 4단계로 이루어진다. ① 신체적인 욕망의 억제, ② 의지의 정화, ③ 정신의 각성, ④ 신과 의지적·존재적 합일이 그것이다. 신비주의는 존재의 근거로 회귀하는 방식의 하나이며, 소외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신비주의에는 비물질적·비논리적·역설적인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비합리적이고 반합리적인 '사고를 배제한 종교'는 아니다. 심층적인 삶의 형식인 신비주의는 인간이 실재의 근거와 만나게 되는 차원은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러므로 신비주의 차원에서는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고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종교와 신비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종교의 창시자들은 분명히 앞서간 신비주의자들이다.

신비체험과 다른 체험과의 관계
신비주의는 마술·기적·기도·예배·과학과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과 신비주의는 접근방법과 강조점에 있어서 다르다. 신비주의는 예배기도처럼 감각적 체험의 연속이 아니라 순수하게 통일된 의식(unitary consciousness)이다. 과학이 분석적이라면 신비주의는 시적·역설적이다. 열광적인 감정주의(emotionalism)와는 달리 신비주의는 사주를 받거나 계략에 악용되지 않으며 정숙하다. 신비주의는 종교의 주장을 긍정하며 사후의 세계를 예시하기도 한다.

신비주의의 정의와 신비체험
신비주의는 예언적 종교나 샤머니즘과는 구별된다. 예언적 종교는 신비주의에 비해 행위를 강조하며, 신과 인간의 절대적인 차이를 말한다. 샤머니즘은 신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신비주의의 정화의 단계와 유사점도 있지만 초자연적인 측면을 보다 강조한다. 신비주의는 감각적인 지식이나 추론적 지식을 뛰어넘는 제3의 지식에 대한 신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비주의의 본질은 일시적인 이해의 범주를 뛰어 넘어 직관의 세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중세 때의 유신론적 신비주의는 인간 영혼이 사랑의 열망을 통해 신을 향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결과 절대자와 교류를 통해 기쁨을 누리게 된다. 19세기의 오토 플라이데러종교 신비주의를 자아와 신과의 직접적인 일치의 감정이라는 배타적인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영국의 리처드 네틀십은 반대로 신비주의는 인간이 경험하는 요인에 대한 상징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신비주의 형태는 상징을 뛰어넘어 절대자와 적나라한 대면을 시도한다. 내향적 신비주의는 밖을 주시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함으로써 절대자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이것은 전반적인 의식의 내용을 거부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영국의 학자 R. C. 제너는 격리형식의 신비체험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영과 물질, 영원과 시간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생물학자인 L.V.버탈란피는 자아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일치와 자유를 체험하는 정상체험(peak experience)을 고백하기도 했다. 신비주의에 대한 태도는 20세기 중반부터 무의식, 초감각적 인지, 진화론적 관점 등에 의해 상당히 수정되었다.

신비체험의 보편적 유형
지성적·관상적(觀相的)인 형태의 신비체험은 분별력에 의존하면서 신이나 지고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사고·의지·감정을 동원하여 지식(지냐나)·업(業: 카르마)·신애(信愛: 박티)를 연결하는 인도의 신비체험이나 요가는 이 유형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유형에서 모든 삶과 삶 속에서 수행해야 할 일이 명상이다. 헌신적인 형태의 신비체험은 사랑이나 헌신을 중심으로 하는 정서적 접근방식의 유형이다. 기도·예배·경배의 의식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유형의 신비체험은 황홀경이라는 보상을 제공해준다. 황홀하고 에로틱한 형태의 신비체험은 교회의 교부들이나 현자들에 의해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유형으로, 정화되지 않은 에로틱한 감정을 촉발시키는 접근방식이다. 인도의 바이스나바 또는 탄트라(性的) 체험은 이 유형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에로티시즘). 20세기에는 약품 등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의료적 신비주의가 등장했다.

신비체험과 신비주의의 목표
신이나 신성한 것을 직접 체험하려는 신비주의는 최고의 선으로 간주되었다. 직접적·직관적 신(神) 인식은 계시 종교와 유사하지만 나름대로 그것은 과학이며 철학이다. 신이나 신성한 것과 합일하려는 신비체험은 인격의 변화인 회심을 가져온다.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존재'나 힌두교의 '재생'(再生)이 그 예인데, 그것은 불경건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여기'로부터 '저기'로의 이행을 뜻한다. 우주를 체험하는 신비주의는 역설적인 신비체험이다. 모든 신비주의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체험자는 시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시간 밖에 있게 된다. 이것은 인간을 편견이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성숙을 촉구하는 체험이다. 사람들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신비체험은 발전적인 인간생활을 도모하려는 신비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를 담고 있다. 신비주의가 초월을 지향하는 데 반해 이 체험은 인간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신을 지향하는 것이다.

인간과 신성과의 신비적 관계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성한 것이 있고 신비주의는 신성한 것에 대한 학문이며 예술이다.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인간과 신을 일치시키는 것을 이단으로 생각했으며 범신론으로 보았다. 이슬람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신성한 것에 대한 체험은 언제나 유쾌한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불안과 공포를 주기도 한다. 어떤 신비가들은 신비체험의 수단으로 금식·명상·자기암시 등을 활용한다. 신비신학에서는 체험 자체를 신의 은총으로 여긴다. 신비체험은 인간이 신성한 것과 다양한 신비적 관계를 맺도록 한다. 서방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을 신비적 합일(unio mystica), 힌두교에서는 구원(mokṣa), 불교에서는 열반(nirvāṇa), 이슬람교에서는 자아의 소멸(fanā⁾)이라고 한다.

신비체험에서의 의미론과 상징주의
대극(opposite)의 합일은 '대극적 일치'라는 의미로 체험의 한 차원을 가지고 다른 차원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상징이며 역설이다. 그리스도와 사탄이 형제라는 말이 이에 해당된다. 겸허와 충만은 표현의 이율배반적 방법을 통해 균형을 찾는 상징이다. 긍정적인 방법은 충만이고 부정적인 방법은 겸허로 표현되어 신은 우주 만물을 다 소유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신의 사자(使者)라는 상징주의는 신비의 실재를 체험했으나 이를 널리 보편적으로 알릴 수 없을 때 특별한 통로를 통해 전달한다는 뜻이다. 사랑과 결혼의 상징주의는 체험자의 영혼을 여성으로 보고 체험의 대상을 남성으로 보면서 모험적이고 심도 깊은 관계를 추구할 때 쓰는 말이다(→ 신성한 결합). 여행의 상징주의는 탐구, 순례의 길을 의미한다. 여기서 길은 위로, 안으로 열려 있으며 역사의 피안으로의 도약도 이루어진다. 이 모든 상징은 발전적인 자아 이해의 과정에서 터득한 지혜이다. 신비체험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해주며 우주의 본질을 보는 제3의 눈과 지혜의 눈을 제공해준다.